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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ulter Club/쓰다, 길게 쓰다

[돌팔매] 라흐마니노프 왈츠

  퇴근을 하고 차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우연히 돌린 라디오 채널에서 멋진 피아노소나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제목도 모르고 작곡자도 모르고 연주자도 모르고 단지 카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멋진 연주를 감상할 뿐이었다. 담배를 두어대를 필 동안에도 연주는 끝나지 않았고, 연주가 마무리가 된 후에야 차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정말이지 나올 수 있었다. 누구라도 가끔 이런 경험을 하겠다. 운전 중에는 집중하지 않던 것이 시동을 끄는 순간 귀에 쏘옥하고 들어온다. 운전뿐만 아니다. 평상시에 무언가에 빠져 생각지도 않던 것들이 문득 그 단단한 긴장감의 끈을 풀어버리는 순간 눈에 귀에 들어오는 것이다.

  입추가 왔다. 가을이 시작된 것이다. 지겨운 장마비와 밤잠 설치는 폭염도 어젯일이 됐다. 거리에 나서면 바람 부는게 예사롭지 않고 불과 하루가 지난 것뿐인데, 바람에서는 심심한 가을냄새가 났다. 다섯건의 기사와 기싸움을 마치고 숨통이나 고를까해서 나온 바깥의 저녁하늘에는 계절 마치는 것이 한스러운 메미소리의 한켠에 작은 풀벌레 소리가 그려지고 있었다. 귀뚜라미소리였다. 귀뚜라미가 귀뚜르르하고 가을을 부르는 소리였다. 맘 속에 고이 접어둔 그 무엇인가를 꺼내는 소리였다. 소리는 음과 음의 연속이지만, 마음은 벌써 달과 달을 지나고 있었다.

  안치환이 부른 '귀뚜라미'라는 노래가 있다. "높은 가지를 흔드는 메미소리에 묻혀, 나의 노래는 아직 노래가 아니요, 풀잎 하나 없고 이슬 한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 옆 그 모진 틈에서 숨막힐 듯 토하는 울음,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소"라고 부르는 노래다. "귀뚜르르"하고 읊는 후렴구가 인상적인 노래다. 문득 김광석의 '서른즈음에' 보다 더욱 서른즈음에 들을만한 노래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올려다보는 높은 가지 위에는 메미소리가 찌렁찌렁하다. 그리고 나의 노래는 아직 노래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 살아있다. 나의 노래는 곧 가을에 울려퍼지는 메아리가 되겠다.

  늦은 저녁에 들은 피아노소리가 아쉬워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을 들었다. 선이 굵은 화음으로 뚝뚝 끊어지듯 시작하는 곡은 순간 파도가 되어 청중을 감싸앉는다. 관현악의 더딘 키질과 달리 피아노를 치는 손은 바쁘게 건반과 건반 사이를 오고간다. 이 장엄한 연주의 작곡가가 왈츠를 춘다는 상상을 해봤다. 모짜르트처럼 위트있는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작곡가가 어울리지 않는 춤을 춘다는 상상을 해본다. 라흐마니노프가 그러겠다. "나에게 왈츠는 어울리지 않는다" 계절이 왈츠를 추는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얼굴을 하고 이야기를 한다. "나에게 이제 여름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에게 가을을 불러다오. 들판이 짙노랗게 얼굴 붉히고 산맥이 켜켜히 묻은 녹때을 다 털어내는 그런 가을을 불러다오"

<from NapSap,Parakshert Doyof, http://cocc.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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