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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ulter Club/쓰다, 길게 쓰다

[돌팔매] 마중바람

 

▶마중물이란 말이 있다. 어려운 숙어 같아 보이는 이 말은 ‘마중을 나간다’의 ‘마중’와 ‘물’이 만난 너무도 예쁜 우리말이다. 우물펌프로 물을 잘 뿜어 올리지 못할 때, 땅 속에 있는 물을 마중 오라며 펌프에 한두 바가지 부어주는 물이다. 물이 마중을 나간다니 발상 자체가 참 재미있다. 콸콸 쏟아질 옥수를 기다리는 마음은 왠지 소나기를 기다리는 마음과 닮았다. 여름을 기다리는 마음과도 닮았다.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우물물은 마중물이 마중을 나가는데, 곧 있으면 쏟아질 소나기와 여름은 누가 마중을 나갈까. 마중을 나간다는 것은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것이다. 누가 그 기대되고 기다리는 기쁨을 누리러 발길을 옮길까.

 

음력과 절기는 참 신통하다. 계절의 시계가 거꾸로 가는 거 아니네, 날씨가 추워서 옴싹을 못하겠네, 볼멘소리다, 아우성이다 했었다. 불과 이틀전만에도 말이다. 입하다. 여름의 초입이다. 거짓말처럼 온도가 달라졌다. 심지어 밤의 온도마저 여름을 입어버린 것이다. 반팔옷에 손이 가고 한낮이면 이마에 땀방울에 맺힌다. 여름이 벌써 등 뒤에 서있다는 소리다. 하릴없이 길을 걷다가 문득 바람을 맞았다. 연분 있는 사람에게 '뺀찌'를 먹었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저 바람을 맞은 것이다. 유월의 저녁 공기 조각 같은 것이 마음에 차분히 스며들었다. 아뿔싸. 마중바람이었다. 곧 다가올 습차고 싱그러울 우기를 마중나온 바람이었다. 우물물은 마중물이 마중 나갔었는데, 우기는 여름은 바람이 마중을 나갔다.

 

춘하추동 사계절 중에서 좋아하는 것을 하나 꼽아 보라면 없다. 내가 좋아하는 계절은 춘하추동에 없다. 춘과 하 사이에 장마기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계절은 세찬 바람과 비가 내리는 시기다. 혹자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냐"며 반문 하겠지만, 세상의 때를 벗기려는 듯 세차게 쏟아지는 여름 소나기는 지난 겨울부터 쌓인 마음의 묵은 때까지 완전히 벗겨내는 기분이다.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은 가슴 속의 뜨거운 불덩이를 식히주는 기분이다. 백미는 다음이다. 모든 현상이 마쳐지고 나서 말갛게 떠오른 푸른 하늘 위로 무지게가 걸리고 미쳐 몸을 비워내지 못한 구름들이 빛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혹사의 시기를 견딘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한저녁을 구름을 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알싸하다. 여름은 그런 맛이 있다.

 

무지게는 그저 빛의 산란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과학자들이 말한다. 옛이야기에서는 무지게의 뿌리가 묻힌 곳에 난쟁이들이 묻어놓은 황금이 있다고 했었다. 일곱 빛깔 무지게는 일곱 빛깔의 사람인생과 닮았다. 빨갛게 타오르는 정열의 청춘 같은 빨강, 가슴 속에 물드는 사랑의 빛깔 같은 주황, 아이들의 어리고 알찬 눈매를 보는 듯한 노랑, 꿋꿋히 자기네 삶을 열심히 채워나가는 아저씨들을 보는 것 같은 초록, 글이네 그림이네 저마다 끼를 발산하며 영혼을 태워 또 다른 영혼의 물질을 하는 예술인 같은 파랑, 세월의 묵직한 먼지가 쌓인 어르신들의 때묻은 옷깃 같은 남색, 신화 같은 느낌을 주는 묘령의 여인네들 같은 보라, 딱 일곱 빛깔에 맞는 일곱 인생이다. 곧 여름이 들이쳐오겠다. 많은 이들이 일종의 '계절의 시련' 같이 생각하는 우기지만, 무지게를 기대하며 참아보려 한다. 더불어 일곱 빛깔의 인생에 대해서 더욱 새로이 곱씹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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