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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ulter Club/쓰다, 길게 쓰다

[돌팔매] 김성근의 유산


▶지방신문에 일할 때다. 한화이글스는 추락한 독수리였다. 날개는 있으돼 날지 못하는 닭과 같았다. 수비는 기어 다녔고, 타선은 맥을 못 췄으며, 투수는 기진맥진했다. 오죽하면 지금 미주대륙에서 활약하는 류현진에게 '소년가장'이란 별명을 붙였겠나. 그가 내려오면 불펜은 무너졌다. 완봉으로 승을 챙길 수밖에 없는 것이 소년가장의 운명이었다. 투수가 잘하면 수비가 뚫렸다. 수비가 손발이 맞으면 타선이 잠잠했다. 어쩌다 야수들이 잘 뛰면 마운드는 붕괴됐다. 한화는 그런 팀이었다. 김응룡 감독과 함께온 코치진은 한화를 한마디로 일갈했다. 저것들은 근성이 없다. 야성이 매말랐다. 해보려는 의지가 없다. 한화가 뒤집어질 때마다 직격탄을 맞던 나였다. 많은 점수차로 이기고 있어도 뒤집어졌다. 승리로 기사를 미리 써논 실력있는 취재기자 선배도, 사진과 제목을 미리 잡아놨던 편집기자인 나도 뒤집어졌다. 야근 때마다 한화는 실망을 안겼다. 야구를 끊은 이유이기도 하다. 한화는 늘 그런 팀이었다. 패배 근성에 물든 팀이었다.


▶환화팬들은 보살이다. 늘 패배를 안기는 한화에 환한 미소를 보냈다. 울고 절규해도 야구장을 떠나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보며 가슴을 쳐도 가슴 속에서 한화를 내치진 않았다. 대전은 대한민국에서 야구를 가장 사랑하던 땅이다. 패배의 쓴맛을 보여주는 홈팀을 보며 쓰디쓴 소주를 목에 넘겨도 쓴소리 한번 제대로 하지 않았다. 늘 격려하고 응원하고 소원을 빌었다. 오늘 만은 제발 이겨달라. 이겨서 우리를 기쁘게 해달라. 기원은 신기루로 끝났다. 오늘도 패배다. 오죽하면 선수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패배를 안겨준 팬들에게 미안함을 표현했다. 그러던 어느날 근성을 잃은 한화에게, 글썽이던 보살팬들에게 희소식이 날라들었다. 김성근 감독이 한화의 '근성 개조 프로젝트'를 맡았다. 호된 훈련에도 선수들은 그가 그려줬던 장밋빛 청사진을 따랐다. 팬들은 그에 대한 기대로 부풀었다. 결과는 좋았다. 승리의 기쁨에 보살팬들이 들썩였다. 부처님상이 놀라 들썩거릴 일이었다. 팬들은 승리하는 한화를 보러 야구장을 더욱 채웠다. 쓴잔은 축배로 바뀌었다. 이기는 맛과 이기는 경기를 보는 맛을 알게 된 것이다.


▶다시 독수리가 추락했다. 한화가 가을야구에 물들 기회가 사라졌다. 몇 경기 안 남은 상황에서 한화는 6위나 7위에 머물 처지가 됐다. 김성근 매직을 외치던 스포츠 기자들이 슬슬 김성근을 때렸다. 이기는 법을 가르치던 그의 훈련에 '선수 혹사'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카리스마는 독선의 리더십으로 바뀌었다. 선수 몇몇의 볼멘소리가 팀의 불만이 됐다. 한참 모자라는 한정된 자원으로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내려는 그의 작전은 투수의 단명시킨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찬사는 낙엽조각이 됐다. 비난이 커지면 누구든 희생양을 찾는다. 잠재워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맡기다시피 했으니 화살은 감독에게 돌아간다. 김성근이 내년 시즌을 한화에서 보내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다시 '감독의 무덤'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꼴찌를 전전하던 팀이 중위권까지 오른 것이 누구의 덕인가. 패배의 근성에 물든 팀을 근성으로 이끈 것이 누구던가. 보살팬들에게 승리의 희망을 안겨준 것이 누구던가. 김성근, 그는 그라운드의 가장 외로운 남자였다. 승리할 때마다 더더욱 외로워졌다. 사다리를 높이 올라갈수록 아래는 더욱 까마득해졌다. 얼마 올라가지도 못했는데 벌써 떨어질 생각에 아찔해졌다. 비난과 책임전가의 수렁 속으로 말이다.


언제 창공을 힘차게 날아본 적이 있느냐. 어쩌면 김성근 감독이 한화 선수들을 만나 가장 먼저 했을지도 모를 말이다. 날개 꺾인, 혹 날아본 적 없던 독수리에게 던진 강력한 메시지 였을지도 모른다. 찾아보면 지난해의 한화와 같은 조직은 세상 어디에든 널려있다. 패배주의와 안락함의 미궁 속에 빠져 이젠 헤쳐나올 길마져 잃어버린 패배자들 말이다. 자신들이 해오던 관행이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음으로 옳다고 믿는 어리석음이다. 고여있는 물은 썩는다. 생각이 멈춘 조직은 도태된다. 변화를 잊은 조직은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어리석은 오판을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하는 조직은 끝판난다. 김성근의 한화는 제대로 이끌어 보려는 리더십과 이제는 한번 해보려는 의지의 집합이었다. 무엇보다 중위권 도약이라는 무시 못할 결과로 보여줬다. 그런 그가 이젠 무시무시한 비난에 휩싸일 처지다. 야구장을 가을빛으로 물들이지 못할 책임론 말이다. 기대가 컸으니 이런 말도 나올 법이지만 시기상조다. 아직 그가 제대로 한화를 맡은 지 일년도 안됐다. 그에게 다시 기회를 줘야한다. 그에게 한화야구 개조 프로젝트 완성을 맡겨야 한다. 다시 한번 세상을 붉게 물들이자. 모든 야구장의 밤을 붉디 붉은 한화의 밤으로 불태우자. 선수들에게 이런 말을 하게끔 해줘야 한다. 고여있는 세상 모든 이에게 던지는 파도 같은 말, 말이다. /납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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