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편집국
중앙일보 1972…편집부는 역시 수석부 였다
천상기 경기대 초빙교수/언론학
한국 신문방송편집인클럽 고문
1970년…당시 서울 종합일간지 사회면 편집기자들은 친목도모 편집권 옹호 정보교환의 취지를 내걸고 매월 한번씩 만났다.
장소는 사직동 대머리집이었다.
회원의 면면을 보면 각사 사회면을 편집하던 동아 천상기 최재욱기자, 조선 이유곤 이현구기자, 중앙 이영식 백시억기자, 서울 이승열 함정훈기자, 경향 박광웅기자, 한국 김진석기자 등이다.
회장에는 제일 연장자인 박광웅, 간사는 김진석을 선출했다.
정해진 날에 어김없이 대머리집에 모여 어수선하던 시대 사회면 편집의 애환을 그리고 뒷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막걸리를 마셨다.
그러나 담당면이 바꿔지고 또 신문사를 옮기는 기자가 늘어나서 불참하는 기자가 많아 1년 가까이 존속해 오다가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 모임에 대해 관심을 보여오던 당시 구자익 중앙일보 편집부장은 ‘엘리트 모임’이라고 비아냥 대기도 했지만 시대상황 속의 사회면 편집의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편집기자 본연의 자세를 다잡아 나갔다.
이 모임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도 있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라이벌 의식은 그때도 대단했다. 동아사회면편집자인 필자는 아침 편집회의에서 그날 사회면 머리기사로 결정한 톱기사를 조선일보의 친구 이유곤에게 알려주었다. 옆자리의 선배 최성두가 전화내용을 듣고 서는 큰일날 일이라고 나무랐다.
나로서는 그날 사회면 톱기사를 상대 라이벌지에 누설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이 친구 이유곤의 전화를 받고 자랑스럽게 말한 것이 화근이 되어 곤욕을 치루었다.
같은 모임의 회원이고 대학동기고 또 늘 함께 지내다 시피 하는 사이니까 괜찮지 싶었는데 크게 잘못한 것이다.
편집기자도 취재기자 특종경쟁처럼 철저하게 신문제작에서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뼈 저리게 통감한 사건이 었다.
동아일보 편집부 근무 4년때 일이었다. 편집부기자들은 어느 회사를 막론하고 편집수당 문제로 봉급 인상 때마다 한차례 홍역을 치른다. 김준철부장이 부원들의 의견을 수렴, 수당인상을 회사에 건의 했는데 고재욱 사장 왈 “우리가 기자시절 때는 외근기자들이 인력거를 타고 다니느라 수당을 받았지 편집국에 앉아 근무하는 편집기자가 무슨 수당이 필요한가”라고 반문하면서 수당인상은 절대 불가하다고 못 박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수당인상이 물 건너간 즈음 서울신문 유범상선배가 어느날 나를 만나자고 전화를 해왔다. 나는 대포나 한잔 하자는 걸로 알고 퇴근 후 유선배를 만났다. 자리에 앉자 말자 대뜸 당신의 지금 동아일보 월급이 얼마냐고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솔직하게 나의 월급액수를 털어놨다. 유선배는 동아 월급에서 일금 1만원을 더 줄 터이니 서울신문으로 옮겨 자기와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의중을 타진해 왔다.
나는 구미가 당겼지만 당장 결정 짓기는 곤란하다고 연막을 치고 곧 연락 하겠다고 약속하고 술한잔을 함께했다.
그 당시 편집기자들은 월급 많이주고 친한 선배를 따라 회사를 후조처럼 이동하는 것이 다반사 였다.
그 후 유선배의 스카우트 후의를 저버리자니 아쉽고 서울신문으로 가자니 선뜻 마음이 내키지않아 동아일보 창간50주년을 지나서 보자고 얼버무려 버리고 말았다.
그 시절 어느신문사고 간에 편집책임자는 소위 ‘자기사람’을 데리고 일 해야 호흡도 맞고 자기 스타일의 편집체재를 구축한다는 측면에서 스카우트 작전을 펴오고 있던 터였다.
스카우트 로비는 편집부장이 퇴근이후 쓸만한 타사의 편집기자를 불러내 술자리를 만들고 월급도 더준다는 미끼를 던지는 수법이 었다. 왜냐하면 신문사 견습기자 출신 편집기자들은 2-3년 일하면 거의가 외근부서로 빠져버려 편집부는 항상 일손이 모자랐고 또 이동이 잦았기 때문이다.
이런 풍토에서 편집부장은 항상 우수 편집기자를 스카우트 해야만 했었다. 그래서 저녁마다 술사주면서 집요하게 유혹하고 금품공세도 펼쳐 편집 잘하면 상한가로 전성시대를 누리기도 했다.
동아일보 사회면 편집자인 나에게도 스카우트 손길이 계속 뻗어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극성은 중앙일보 구자익 부장이 었다. 구부장은 퇴근후 으레히 나를 불러 한잔하면서 취한 후 자기집에 까지 데리고 가 중앙일보에서 함께 일 하자고 설득해 왔다.
드디어 구자익부장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지 못하고 중앙일보로 옮기기로 결정을 본 것이다. 물론 월급도 1만원 정도 더 받고, 거의 한달 가까이 줄다리기를 하다가 최종 결심을 한 셈이다.
이로서 벌써 2번째 신문사를 옮기는 편집후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신아일보 창간 1기 견습기자로 출발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이제 중앙일보 기자로 새로운 출발 선상에 서게 된 것이다.
중앙일보에 첫 출근 하는날 편집국 분위기부터 내가 거친 두 신문사와는 사뭇 달랐다. 깨끗한 건물 잘 정돈된 편집국, 그리고 단정한 용모의 사람들 …마치 은행이나 관공서 같은 느낌 마저 들었다. 당시 편집국 진용을 소개하면…회장 이병철 사장 홍진기 논설주간 김승한 편집국장 이규현 편집국장직대 김인호, 편집부국장 이광표, 박경목,김지운,편집부장 구자익, 정치부장 김동익,경제부장 박동순, 사회부장 김천수, 문화부장 손기상, 부국장대우 지방부장 이강현, 체육부장 한인성, 과학부장 이종수, 사진부장 조용훈, 부국장대우 교정부장 김호, 주간부장 이상규, 편집위원 신동헌 등이다.
함께 일할 편집부 라인 업을 소개하면…부장 구자익, 차장 정갑수, 문윤곤,기자 이정배, 주명갑,한규남,지명수,최정수,박기택,박노웅,박종흠,이유곤,이영식,백시억,이제훈,임준수,이은윤,장승호,김윤식,김수보,목철수,박군배,이해영,전상권,김송번(이상70년) 김영배,이 협,임재걸,연국희,박준영,지영선(이상73년) 등이다.
나를 스카우트한 구부장은 맨 먼저 간지 4면을 편집하라고 지면 배당을 했다. 스카우트 과정에서 오간 약속으로는 중앙일보에 오면 사회면을 맡기겠다고 했는데… 동아일보 사회면 편집자를 중앙일보로 스카우트 해오면서 동아일보 같은 편집효과를 노리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는지 그건 하나의 속셈이 었는지 모르지만…
동아일보로 전입 할때는 고작 기자 경력 2년차 였지만 사회면을 주무르던 솜씨인데 까짓 중앙 간지 4면 쯤이야 하고 우습게 보아온 터였으나 꼭 그렇지만 않다는 것을 실무에 임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무릇 편집스타일이 데스크의 취향과 신문사 사시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회사를 옮길 때 마다 그 곳 데스크 스타일에 영합하는 것이 바른 언론의 길인지 혼란 스러웠다.
구부장은 동아일보 간지 편집할 때 써먹든 편집스타일과는 다른 변화된 지면구성을 요구해 오는 것이아닌가… 나는 새삼스럽게 당황하지 않을 수없었다. 공과 사가 분명한 구부장은 퇴근후 술자리에서는 격의없는 농담과 대화를 나누지만 일단 편집업무에 돌입하면 편집부장으로서 카리스마와 자기 스타일의 편집을 고집해 오곤했다. 가차없이 메스를 가해오는 변화된 편집제작에 적응 하면서 공무국 사람들과도 손발을 맞추느라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한가지 예를 들면 동아일보 간지의 경우 ‘이달의 소설’은 그대로 제목으로 하고 소개되는 몇몇편의 소설을 소제목으로 편집했다.
그러나 중앙일보의 경우는 ‘이 달의소설’ 여러작품에서 공통된 흐름을 찾아 공통분모로 제목을 만들어야만 했다.
‘이 달의 소설’은 여러명의 소설가가 이달중 발표한 작품을 간추려 소개하는 것인데 소제도 다르고 내용도 제각각 이므로 여러 소설의 공통분모를찾아 제목을 달기가 그리 용이한 작업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해오던 손에 익은 버릇을 버리고 새롭고 변화된 지면구성을 위해 땀을 흘려야만 했다.
몇 달이 지나자 나는 간지 3면 편집을 맡아 12단을 당일 아침에 제작하게 되었다. 큭기할만한 일은 그때는 컬러 제작이 아주 복잡해서 작업도 2~3일 전에 사진부의 컬러필름과 취재부의 기사를 받아서 원색사진은 제판부와 사전협의를 거쳐 ‘중앙일보 컬러의 눈’을 만들었다. 옵셋컬러가 아니었기에 필름의 확대비례를 정확히 계산하는 방법을 편집자가 알아야 했도 확대와 축소의 비례에 크게 신경을 써야만 했다.
타지에서 시도하지 않은 컬러지면 제작에 편집국장 등 간부진은 비상한 관심을 보여서 제목은 부장보다 김인호 편집국장과 직접 상의해서 결정하곤 했다. 컬러 커트의 모양과 색깔 등에도 신경을 곤두세워 사진제판부 이승권 차장과 일본 신문을 들추면서 비교 연구하기도 했다.
국내 신문에서는 한 번도 쓰지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커트 모양을 개발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전력투구한 결과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커트가 ‘중앙일보 컬러의 눈’을 돋보이게 했음은 물론이다.
김인호 편집국장은 나의 컬러신문 제작을 격려하면서 노하우를 칭찬해 주었다.
특집기획물인 ‘민족의 증언’을 비롯 ‘김일성 열전’, ‘일본에 심은 한국’ 등은 모두 내가 도맡아서 편집했기에 김승한 주필 증 회사 간부들과 자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일본에 심은 한국’은 김승한 주필이 직접 일본 현지 취재를 다녀와서 연재하는 시리즈여서 제목과 레이아웃, 사진 크기등을 일일이 체크하면서 대장도 주필이 보고 OK를 낼 정도였다. 기획물 연재로 편집자와 가깝게 되어 김부필은 양주를 사는가 하면 자기 차로 집까지 데려다주는 등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신문사 3곳을 옮겨다니면서 나는 각사의 편집부장을 비롯 많은 편집 선후배기자들과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퇴근 후 으레 찾는 사직동 대머리집에는 항상 조선일보 조영서 부장이 측근 부원 수명을 대동하고 나타나는가 하면 동아일보 권도홍 부장도 꾼들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모두 함께 막걸리를 마시면서 공통 화제는 신문편집으로 귀결된다. 조선일보 조부장은 거나해지면 왕년의 국민일보 시절 편집이 단연 압권이었다고 회상하면서 그 사례를 열거해 나가곤 했다. 사회면 머리에 파격적으로 큼직한 사진… 즉 어느 몹시도 추운 겨울날 서울거리 스케치 사진을 섰는데 행인들이 너무 추워서 하나같이 외투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는 그림이어서 조영서부장은 ‘손이 없는 사람들’이란 제목을 뽑았다고 자랑을 늘어놓은 후 얼마나 멋지고 간결하며 와닿는 촌철살인의 제목이냐며 자화자찬을 토해냈다. 옆 자리에서 술잔을 비우던 후배들이 ‘기가 막히는 제목’이라고 감탄하자 신이 난 조부장은 자랑 한자리를 더 늘어놓았다.
자유당 시절 우리바다 전관수역에 일본어선들이 침입, 마구 고기를 잡아가는 불법 어로사건이 많이 발생해서 국회에서도 정치문제화된 적이 있는데 이 사건에 즈음해서 조부장이 뽑은 사회면 제목은 ‘바다여 미안하다’ 였다고, 우리 바다의 고기를 우리가 잡지 못하고 일본에 빼앗기고 우리 전관수역에 일본어선이 불법조업을 하도록 방치해 버렸으니 한국은 우리바다에 미안한 것이 아니냐는 푸념을 곁들이면서.
한편 동년배로 알려진 동아일보 권도홍부장 또한 질세라 자기의 ‘명제목’을 소개해 나갔다. 동아일보 1면 왼쪽에 카메라 고발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스고 사진 밑에 캡션을 커트로 떠서 시각적 고발기사로 취급한 적이 있는데 1면 편집자가 적절한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끙끙대고 있을때 권부장이 순간적으로 읊어준 제목이 ‘이승서 지고간 주택난…’ 그 사진은 초만원이 된 망우리 공동묘지를 찍은 것.
두 부장이 후배들과 술자리에서 왕년의 명 편집과 제목을 열거하면서 거나하게 술이 취해 기고만장, 호연지기를 펴던 낭만시대 편집이야기라고 하겠다. 그러나 조부장이나 권부장이 명 편집, 명 제목이라고 자랑스럽게 되뇌이던 기발한 표제는 50~60년대 신문을 장식한 아련한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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