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면 안된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병치레가 잦았었다. 혼자 병원을 나서는 날에는 혼밥을 먹어야 했다. 혼자 먹을 때는 라면 김밥이 좋다. 세종문화회관 근처 분식집에 다다랗다. 그렇다 쫄면 얘기다. 매콤새콤한 쫄면, 별 거 아닌 채소와 별 거 아닌 소스에도 참 별난 맛이다. 그날은 쫄면이 먹고 싶었다. 메뉴판에 떡하니 자리한 두 글자는 국민학교 때 첫사랑의 이름표 같았다. 쫄면이라고 부르면 고개를 돌리며 쳐다볼 것 같았다. 주인에게 쫄면 하나라고 불렀다. 참치김밥도 추가했다. 참치는 되는데 쫄면은 안 된다고 했다. 쫄면 안 된다고 했다. 국민학교 때 첫사랑처럼 쫄면은 나를 외면했다. 쫄면에 차인 마음을 치즈라면으로 떼웠다. 치즈라면이 쓰린 속을 달래줄 때 한 무리 아가씨들이 들어왔다. 쫄면 달라고 했다. 쫄면 안 된다고 했다. 쫄면 먹으러 왔다고 했다. 쫄면 됐다. 나는 안 되고 그녀들은 됐다. 나는 외면 받고 그녀들은 쫄면 받았다. 배가 아팠다. 속상했다. 빈정이 상했다. 다 먹고 계산하려 카드를 내밀었다. 주인은 카드기계가 없다며 현금이 없냐 했다. 현금 없다 했다. 알았다며 카드를 긁는다. 없다고 하면 나오는 가게다. 치즈라면 하나 참치김밥 하나 거의 8000원 돈이다. 어디가면 설렁탕 한 그릇 먹을 돈이다. 이래저래 속 긁는 가게다. 그날 이후로 내 병원밥은 회덮밥이 됐다.
국수집에 간 저녁이었다. 혼자 산다. 홀로 퇴근길을 걸을 때도 혼밥을 먹어야 한다. 밥보다 국수가 먹고 싶은 날이었다. 세종문화회관 근처 국수집에 다다랗다. 역시 또 먹는 얘기다. 해물비빔국수를 시켰다. 메뉴판이 그럴싸 했다. 소개팅 레스토랑에 앉아 누군지 모를 님을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똑똑하고 문을 두드리고 어여쁜 해물비빔국수가 들어올 것 같았다. 카운터 근처에 앉은 것이 실수였다. 똑똑하고 문을 두드리며 한 무리 아줌씨들이 들어왔다. 각자에게 메뉴판을 나눠줬다. 각자 하나씩 메뉴를 골랐다. 점원은 각자의 메뉴를 다 기억하고 카운터로 돌아왔다. 4명이서 4가지 음식을 시켰더니 싸가지 없다고 했다. 손님인 나에게 들리게 뒷담화를 했다. 귀를 의심했다. 장사치들은 마음 속으로는 할지언정 들리게 말하지 않는다. 마음의 말을 읽는 초능력이 생겼나 의심도 했었다. 똑똑하고 바닥 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해물비빔국수가 왔다. 해물과 소스가 따로 놀았다. 면은 어딘가로 배달 됐다 돌아온 듯 했다. 먹고 있는데 그릇이 지저분하게 보였다. 돼지 같이 생긴게 돼지 같이 쳐먹는다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나에게 던질 비난이 두려웠다. 어서 먹고 계산하려 카드를 건넸다. 다행히 카드를 받아줬다. 8000원 돈이다. 참치김밥 한 줄도 못 먹었지만 8000원 돈이었다. 국수만 몇 젓가락 대충 집어 먹었지만 배고프지 않았다.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은 것 같아서 배불렀다.
경기도 부천 어딘가로 이사를 했다. 여기서도 혼자 산다. 혼자 밥해먹기 싫어 혼밥을 사먹으러 갔다. 며칠전 눈여겨본 가게에 다다랗다. 메뉴는 거의 3000원 4000원이다.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쫄면과 참치김밥을 시켰다. 점원이 예하고 돌아갔다. 양은그릇에 담긴 쫄면과 당장이라도 옆구리 터질 것 같은 참치김밥이 찾아왔다. 병치레 하면서도 못 먹어본 음식을 병을 떨쳐내고서야 먹게 됐다. 딱 3500원 어치 정도의 쫄면이었다. 2500원 짜리 참치김밥은 3000원 어치는 돼 보였다. 두개를 먹고 6000원을 계산했다. 주인은 현금이건 카드건 개의치 않았다. 500원 정도 효용은 더 얻은 것 같았다. 첫번째집 김밥이 생각났다. MSG도 안 넣고 화학 머시기도 안 넣었다고 했다. 안 넣었으면 그만치 재료비도 덜 쓴 것인데 값은 1000원이 비쌌다. 인심도 안 넣고 양심도 안 넣고 수심만 넣어줬는데 값은 1000원이 더 비쌌다. 쫄면 안 된다고 말한 주인이 다음엔 된다며 미안하다는 한 마디 정도는 해줄꺼라 생각했었다. 두번째집 국수도 생각났다. '풍속에 "떡국을 드시면 부자가 되고 국수를 드시면 장수한다"고 합니다'라고 써놨다. 떡국을 안 먹어서 인지 돈은 아깝게 썼다. 낙지도 넣고 김치도 넣고 김가루에 계란지단도 넣고 욕도 한 바가지 넣은 거 같아 장수할 것 같다.
음식의 값어치는 달라도 밥상의 값어치는 누구나 같다. 삼시세끼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세 만찬이다. 누구는 시킬 수 있고 누구는 시킬 수 없는 음식은 없다. 시키지도 않은 욕을 받아 먹을 의무는 없다. 개도 밥을 먹을 때는 건들이지 않는다고 했다. 밥그릇을 걷어차지 않는다고 했다. 밥상은 평화다. 예전엔 밥상머리에서 애를 혼내면 시부모는 며느리를 혼구녕 냈다. 밥 먹는 때 만큼은 평화를 깨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할머니는 밥시간 때 친구집에 놀러를 가면 혼을 냈다. 누군가의 집에 가서 밥상의 평화를 깨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따뜻한 밥한술은 미운이나 고운이나 넉넉하게 퍼주는 우리네 마음이었다. 같이 밥먹다가 친해지고 사랑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같이 밥먹는다. 삿대질하고 욕하고 싸우고 다시는 안 볼 것처럼 해도 같이 밥먹다가 푼다. 생일날에는 생일상을 차리고 잔칫날에는 잔칫상을 차리고 제삿날에는 제사상을 차리고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같이 밥먹는다. 그 밥상이 뒤집어진다는 건 그 집안에 큰일 생겼다는 소리였다. 누구나 개보다 존엄하게 밥먹을 권리는 있다. 개새끼라고 욕을 먹어도 밥은 존엄하게 먹을 권리가 있다. 사형수도 밥은 존엄하게 준다. 음식은 안 상했어도 속이 상하는 밥상을 받고 싶지 않다. 속이 편한 밥상을 받고 싶다. 내 돈주고 먹는 음식 편안하게 먹고 싶다. 간사하게 장사하지 말자. /납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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