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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ulter Club/쓰다, 길게 쓰다

[돌팔매] 지금은 더워도 좋다.

  팔월도 이제 다 갔다. 팔월의 마지막 날이다. 잦은 강우로 우리를 괴롭히던 여름이 멀리 달아나나 했더니, 아직 그 맹위를 거두지 않고 있다. 늦더위가 온 것이다.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연 가정들은 다시 창문을 닫고 기계에 의존하며 더딘 여름밤을 보내고 있다. 땀이 많은 사람들은 다시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면 더위를 잘 타는 승객들은 온도조절을 못 하는 기사에게 애꿎은 볼멘소리다. 다들 뒷더위에 힘겨워한다. 하지만 지금은 더워도 좋다. 아니 더 더워도 충분히 상관없다. 늦은 여름이지만, 이른 가을이기도 하니까.

  나무가 바쁜 계절이 왔다. 밤이면 지난 여름 내린 단비를 찾아 땅속 깊숙이 뿌리를 뻗어야 한다. 낮이면 사방에서 내리쏟는 광휘에 온몸을 내맡겨야 한다. 그 분주한 안간힘은 붉고 탐스러운 과실을 키운다. 과실의 풍만한 곡선을 위해 나무는 오늘도 햇볕 아래 서 있다. 정신이 아찔할지도 모른다. 제 가진 습기를 모두 공중에 증발작용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나무의 업이다. 그게 동물과 나무의 다른 면이다. 동물은 봄에 결실을 맺고 여름에 살찌우며 가을엔 쉴 곳을 찾는다. 나무는 가을에 결실을 맺고 긴 겨울밤을 인고로 견딘 뒤 봄에 다시 잎새를 틔운다. 동물이 쓰러진 자리는 나무의 좋은 토양이 된다. 나무가 던져주는 과실은 동물에게 유익한 비타민이 된다. 모든 게 상호 작용이다. 상호 유익한 작용이다.

  올여름 비가 많아서 과일값이 날뛴다. 이러다 시장가서 사과, 배 몇 개 들면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들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낙과는 잘 주워서 맛있게 먹지만, 조상님 상에 올리는 것은 좋은 걸로 하고 싶어한다. 어찌 보면 손으로 인위적으로 딴 과일은 아직 영글지 않아서 매달려 있었는지 모른다. 반면 비바람에 달랑달랑하다가 떨어진 과일은 씨앗에 좋은 양분을 공급해줄 과육이 이미 충분히 배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크고 빛깔이 좋고 생채기 하나 없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건 겉치레다. 오히려 작고 볼품없고 여기저기 긁힌 자국도 많지만, 한입 배어 물면 달달함이 혀끝을 감도는 것이 참 좋다. 또 세상에 둥글둥글 돌아다니는 '보통 것'들은 '유별난 것'보다 더 가치 있다. 그 가치를 모르는 '유별난 것'들이 '보통 것'들을 속이고 하대한다. 세상에 '보통 것'들이 없으면 '유별난 것'들은 과연 존재할까.

  날이 덥다 보니 오만 생각이 다 든다. 그 오만 생각들은 알 수 없는 파형의 전파가 되어 판단을 어지럽힌다. 그러다 자자 드는 밤이 되면 모든 게 차분해진다. 그 오만 것들이 불붙은 석양에 다 타 없어진 것만 같다. 석양이 가장 붉은 때는 늦여름이다. 가을은 단풍이 가장 붉다. 우리 서쪽 하늘은 늦여름이 가장 붉다. 몸 가벼운 비구름들이 함께 해준다면 더욱 장관이다. 저 멀리 판타지가 펼쳐진다. 노루 같지 않은 노루와 토끼 같지 않은 토끼가 뛰어놀 것만 같다. 늦여름의 석양을 바라보며 느끼는 건 한해를 잘 마친 기쁨이요, 다음 한해에도 무난히 보내기를 바라는 인간의 마음이다. 가을은 또 추수의 계절이지 않은가. 들판에서는 곡식을 줍지만, 석양을 바라보고 있으면, 한 해 동안 여기저기 버려둔 생각들을 줍는 기분이다. 생각의 추수의 계절이 곧 가을만 같다.

  그래 지금은 더워도 좋다. 아니 더우면 더더욱 좋다. 허리가 길어진 햇빛은 과일을 탐스럽게 키울 것이다. 잠자리를 뒤쳐기며 듣는 풀벌레소리는 그리운 이를 떠오르게 하는 주문이다. 낱알이 떨어진 자리에는 삼삼오오 새들이 모여들고, 바쁜 부리짓은 새끼를 기르려는 어미의 마음이다. 수레 가득 포대를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는 자식이라도 새로 얻은 기분일 것이다. 모두의 마음이 잡혀지지 않는 무언가로 꽉 채워진다. 문득 이대로 여름을 보내기는 너무도 아쉽다. 그렇다고 아직 낯설은 가을을 마주 바라보기엔 부끄럼이 많다. 여름 같지도 가을 같지도 않은 이때, 이때가 참 좋다. 이른 봄의 나른한 햇살에 비길 만큼 환상적이다.


<from NapSap,Parakshert Doyof, http://cocc.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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