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과 1 사이
키보드를 두들기던 남자는 눈을 들어, 모니터 구석에 자리잡은 시계를 바라본다. 오전 2:02분, 의자에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의미없이 눈을 뜨고 있는 컴퓨터를 상대한지도 두어시간 정도 지났다. 그 모든 시간이 의미없었다고 생각이 들었을까! 잠시 허공을 응시하더니 가방에 손을 집어넣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찾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 책을 접거나, 책갈피를 꼿지 않는 것은 그의 버릇이자, 고집이다. 남자는 접거나 무엇을 꼿지 않아도 쉽게 자기가 읽던 페이지를 찾아간다. 집비둘기의 습성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색이 바랜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남자는 혀로 핣듯 책을 읽어버린다. 두 다리를 책상에 고이 올리고, 가장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어, 못다 읽은 부분을 하나하나 곱씹는다. 담배를 하나 꺼내어, 불을 지피고, 익숙히 한 모금 길게 내뿜고는, 도토루 커피통에 재를 떤다. 멋진 재떨이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몇번이나 한 것 같으나, 남자는 쉽게 포기했었다. 재떨이가 있으면 당연히 그것을 비워야 하고, 또 깨끗이 부셔서 수건으로 딱아야 한다. 그런 것들이 미친듯이 귀찮아진게 틀림없다. 책상 위에는 남자의 귀찮음이 약간의 먼지와 못생긴 담뱃재들과 함께 흩어져 있다.
스피커는 번스타인의 <바이올린, 하프, 타악기를 위한 세레나데>를 뱉어내고 있다. 남자는 담배연기를 뱉어내고 있다. 남자는 무언가의 흥미를 위해 이 곡을 선택한 것 같지만, 그리 귀를 기울이지 않고 책에 빠져 있다. 담배피던 입이 쌉싸름 했는지, 초콜렛을 하나 까서 입에 집어 넣고 녹인다. 짧은 다섯곡이 끝날 즈음에, 남자의 독서도 끝이 난다. 서평을 읽지 않는 것은, 낭비를 싫어하는 남자의 습성이다. 서평은 남의 판단이고 남의 주관이다. 남자는 1분 정도, 영혼을 책의 여운에 맡긴다. 서평을 빠르게 넘기면서, 주목할만한 말들이 있었나 살펴본다.
"사람은 기억을 연료로 살아가는 것...."
이런 말이 어디에 있었을까! 골똘히 생각해봐도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유치원에서 무엇을 배웠냐고 물었을 때의 어린 아이의 얼굴이다. 문득 <행복의 엘레베이터>에 대해서 생각한다. 곧 써야지, 언젠간 써야지 남자는 수없이 생각한 것 같은데, <해바라기 환상>을 써야겠다라며 잠시 포기한 것 중에 하나인 듯 싶다. 어제부터 골몰하던 <개화>에 대한 짧은 모티브를 생각한다. 무언가 만족한 얼굴이다. 무엇보다 남자는 기억을 연료로 살아간다는 말이 의미없음을 깨닫는다. 사람이 기억을 연료로 살아간다면, 끔찍한 기억의 사람은 영원히 끔찍한 연료를 때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 그렇다면 그 그으름이나 냄새는 어찌할 것인가! 남자는 자신이 번개탄의 일산화탄소 냄새를 좋아한다는 것을 생각해낸다.
"너는 잊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잊지 않는다"
"너는 결코 도망가지 못한다"
책에서 중국인 매춘깽들이 하던 기계적인 말이다. 남자는 그 말이 더욱 의미있음을 생각한다. 그건 마치 기억이 하는 말과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기억이 말한다.
"너는 잊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잊지 않는다"
기억은 주인이자, 생산자인, 주체에게 말한다. 너는 잊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너는 일부를 받아들이고, 일부는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너의 인식에 큰 자리를 펴고 앉아 있다. 너는 어떤 완력으로도 우리 중에 하나를 끄집어 낼 수 없다. 우리는 다같이 모여 있을 때, 의미를 같는다. 우리 중에 하나라도 없다면, 그건 너가 불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많은 우리들은 너를 이루고, 너는 우리를 창조해낸다. 너는 생득적으로 우리 중에 일부를 얻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은 너로 인해 초청받은 손님들이다. 너는 좋으나 싫으나 우리를 모두 끌어앉고 살아야 한다.
"너는 결코 도망가지 못한다"
남자는 자신이 결코 기억들로부터 도망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것을 포장지에 잘 싸서, 지친 얼굴의 택배기사에게 맡길 수도 없다. 조각조각 모아서 불쏘시게로 잘 쑤셔 가면서 태울수도 없다. 기억은 암각화처럼 사람의 살과 살 사이에 곱게 새겨져 있다. 의도적으로 일부를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그건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너는 결코 도망가지 못한다. 너는 춤추는 우리의 한가운데에 있다. 너는 단지 우리 중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할 뿐이다. 넌 나약한 선택자이다.
남자는 이 말을 깊게 생각한다. 인간은 나약한 선택자인가! 0과 1 사이의 시간들이 흐르고 있다. 남자는 그 시간 속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밤은 자동차 바퀴소리 밑에 조용히 잠들어가고 있다. 남자는 마지막 담배를 끄고, 자리에 누워 핸드폰 시계를 바라보고 눈을 감는다. 시간이 쫓기는 배달부처럼 도망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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