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들은 언론사들로부터 뉴스를 공급받는다. 게중에는 회자되는 뉴스가 생기고, 식자들은 그 뉴스를 보면서 갑론을박을 벌인다. 그 뉴스는 이슈라는 새 이름을 갖고 제2 제3의 가지를 만들어내며 파생하는데, 그 과정에서 두 가지 기형적인 작태가 벌어진다. '마녀사냥'과 '이중잣대'이다.
대중은 이슈의 중심에서 속죄양을 찾는다. 마치 그것이 자신들의 원죄를 대신 받을 대상을 찾는 것과 같이. 우리는 '서태지-이지아의 이혼소송'과 같은 이슈에서 대중들이 이지아를 속된 말로 '화냥년'으로 다루는 꼬라지를 보았다. 자신들은 그저 멀리서 바라만 봐야 하는 희대의 남자 배우들과 가수의 결혼-스캔들과 관련하여 마치 이지아를 고위층만 상대하는 텐프로와 같은 인식을 갖고, 그런 '화냥년'이 우리 오빠와 놀아난 것도 모잘라 위자료까지 청구한다며 어이없어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서태지가 당시 16세이던 중학생과 놀아났던(아무리 4살 차이가 나더라도, 법리상) 경력에 대해선 문제삼지 않는다. 만약 당신의 딸래미가 16살 중학생인데, 20살 대학생놈이 껄떡거린다고 해보자. 눈깔을 도려내고 싶지 않을까? 아무도 그녀의 외롭고 불행했던 결혼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 오빠들'하고 놀아났다는 이유로 이지아는 '마녀사냥'을 당했다.
'마녀사냥'의 원인은 '이중잣대'이다. 이슈가 사회에 회자되면서 뉴스의 최종소비자들의 처지에 따라 각기 잣대가 생기고, 대중은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게 된다. 거기에는 객관성을 잃은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도 한몫을 한다. 언론은 태생이 섹시를 좋아한다. 섹시하지 않은 뉴스는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언론이 섹시한 뉴스를 만들고 대중들이 그것을 주전부리 삼으면서 자연스럽게 이슈의 소비자는 양자로 나뉜다. 까려는 자와 옹호하는 자. 논쟁이 생기고 밤낮 댓글에 여념이 없다. 당장에 내 밥상머리와 상관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그것을 즐긴다. 원래부터 대중을 위시한 인간은 호전적이며 남을 까기를 원하는 지극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까일 것을 각오하고, '십자가 사망사건'과 관련하여 몇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선 사건 현장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에 올린 글이다.
"해발 육~칠백미터가 되는 곳에 이르니 흰색 신형 코란도가 서있고 인기척이 없다. 노인분은 그곳에 남고 더 올라 바위 절벽 쪽을 바라보니 웬 나무로 만든 십자가 서 있다. 교회 사람 가운데 누가 기도하려고 제단을 만들어 놨나 생각을 하고 가까이 가보지 나무 십자가에 마네킹 같은 사람이 매달려있다. 마네킹을 매단 십자가의 기도장소인가 보다 하고 더 가까이 가보는데... 아~~정녕 사람이 매달려있다. 2~3미터 거리에 다가가 보니 사람이 매달려 있다. 머리에는 뾰족한 가시(탱자나무인가?)로 만든 관을 쓰고 양팔을 벌려 손이 못박혀 있고 그 사람의 오른쪽 옆구리에는 찔려 피가 말라있고 발에는 새끼손가락 굵기가 안되는 못이 양발에 박혀있고... 좌우에는 각목으로 십자가를 세우고 오른쪽 십자가에는 손거울이 올려있고 그 앞에는 시계가 놓여있다. 왼쪽 발 아래에는 식칼이 있고 그 왼쪽에는 포장끈으로 만든 채찍이 있다. 오른쪽 눈은 부어 감겨있고 왼쪽눈은 반쯤뜨고 사각 팬티만 입은 채로 서 있다"
"나는 그 사람이 그렇게 행한 그 사람만의 믿음에 대해서 판단, 정죄할 수 없고 그 사람의 신앙은 그 사람의 고유한 것이니 그대로 존중해줘야 한다고 기자에게 말했더니 조선일보 기사에서 앞뒤 모두 잘라 버리고 마치 십자가에 그렇게 죽은 그 사람의 행위를 존중해줘야 한다고 기사를 내보낸다"
위 글들은 "십자가에 달린 사람 - 그 발견과정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발견자가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에 올린 글이다. 목격자는 아주 덤덤하고 객관적으로 당시 상황을 논했다. 그는 한마디도 '개독'이라고 쌍심지를 켜지 않았을 뿐더러, '신앙은 그 사람의 고유한 것이니 그대로 존중해줘야 한다'고 공자님처럼 말했다. 위 사실들은 S모 방송국과 J모 신문을 통해 보도되면서 부활절 시즌에 어느 맹신자가 벌인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묘사되었다. 거기에 소망교회와 현 정권에 지친 대중들이 그 행위 자체를 '개독'이 벌인 쇼로 간주해버렸다. 정파로 일컬어지는 기독교인들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사이비들이 저지른 일이라며 선긋기에 열중했다. 유서도 없었고 그가 어느 특정 교파에 치우친 사실도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어느덧 그는 '유다'가 되어 있었다.
필자는 그 사건을 단순히 종교에 심취한 한 개인의 믿음행위라고 판단된다. 왜 그가 대중의 그릇된 잣대에 순수한 영혼을 도륙당해야 하는가? 그가 이단행위를 하였는가? 그가 타자를 자신의 믿음에 현혹했는가? 그가 타자의 금전을 강탈했는가? 그가 믿음을 이유로 부녀들을 건들였는가? 그가 죽으면서 '불심지옥'을 외쳤는가?
앞서 불교계에서도 순교행위가 있었다. 4대강 사업을 반대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강에서 스님이 분신 공양을 한 것이다. 그의 죽음은 불교계와 4대강은 반대하는 무리들에게서 미화되었다. 분신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잔학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댓글이 달리지 않았다. 정부는 스님을 태워죽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아무도 스님과 불교 자체에 대해서 욕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질문을 하고 싶다. 십자가 순교와 분신 공양이 머가 다른가? 둘다 현대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끔찍한 형태의 죽음이다. 합목적성에 부합한다고 해서 찬양받을 이유도 없고, 단지 기독교가 싫다는 이유로 비난 받을 이유도 없다. 어떠한 이단적 단서가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대중은 자신이 편한대로 이중잣대로 판단하기에 앞서 그 화살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올수도 있을 알아야 한다. 그대들이 객관성을 잃어버린체 다수라는 편의에 묻혀 판단력을 잃어버린다면, 영원히 이슈생산자들의 먹잇감이 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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